'투표 보조 거부'에 발길 돌린 발달장애인들…"죄인된 느낌"
보조인 동행 거부 당한 발달장애인들 "참정권 침해"
선관위 "장애인 자기결정권 침해·대리 투표 가능성 있어"
- 이기범 기자, 권진영 기자
(서울=뉴스1) 이기범 권진영 기자 = "기분이 너무 나쁘고 죄인이 된 느낌이에요."
제21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29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주민센터 앞에는 발달장애인 5명이 투표장에 들어서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자력으로 투표가 힘들다며 보조인의 동행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가 있는 박연지 씨는 "(투표소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고 책상만 보고 얘기를 하는데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투표용지 표가 작아 실수를 할 수 있어 쉬운 투표용지도 필요하다. (보조인이 없으면)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발달장애인인 노호성 씨는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건 처음 봤고, 무시 당하는 기분이 들어 속상하다"며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침해당한 거로 느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날 투표소를 찾은 발달장애인인 박지은 씨는 보조인 동행이 거부되자 얼굴을 붉히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날 사직동 투표소에 함께 방문한 발달장애인 7명 중 2명 만이 투표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기표 용구 시험지를 통해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는지 신체장애 정도를 확인 받은 뒤 손 떨림이 심한 1명만 보조인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며, 다른 1명은 보조인 없이 혼자 투표를 했다.
이들과 함께 투표소를 찾은 한국피플퍼스트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들은 보조인이 필요한 발달장애인들이 참정권을 침해당한 것이라며 항의했다.
발달장애인들은 투표소마다 보조인 허용 여부가 다르다고도 짚었다.
당초 2016년 이후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지침에 따라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선관위는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법에 어긋난다며 해당 지침을 삭제하고 시각장애나 신체장애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발달장애인들의 투표 보조를 다시 거부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제외하고는 같은 기표소 안에 2인 이상이 동시에 들어갈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후 보조를 받지 못한 발달장애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이를 기각했지만, 지난해 12월 서울고등법원은 발달장애인도 투표 보조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며 일부 청구를 인용했다. 그러나 선관위는 공직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해당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했다. 선관위는 대법원 최종 판결 전까지는 현행 기준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선관위는 장애 정도나 양상이 다양한 발달장애의 특성상 모든 발달장애인에게 투표 보조인을 허용할 경우 예외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지고, 오히려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침해, 대리 투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선거인이나 동행인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을 설명할 경우 적극 고려하도록 돼 있다"면서도 "투표 보조 제도는 헌법상 비밀투표 원칙을 침해하면서까지도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예외적 운영을 무한정 확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 "모든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다 허용할 경우 (보조인으로 인한) 자기결정권 침해, 대리 투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투표소마다 보조인 허용 여부가 다르다는 지적에 대해 이 관계자는 "발달장애의 양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일괄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비장애인인 투표 관리관이 현장에서 혼자서 투표가 어려운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장애인과 동행인의 설명을 듣게 되는데 이 의사소통 과정에서 허용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단순히 발달장애가 있어서 투표가 어렵다고만 설명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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